中國 본토 공격 계획 거부되다
맥아더는 11월 중공군의 대공세로 유엔군이 全전선에서 후퇴할 때 대만의 장개석 군대를 유엔군에 편입시키고 이 군대가 중국에 상륙작전을 펴서 제2전선을 형성하도록 해달라고 워싱턴에 건의하는 한편, 만주폭격의 허용 및 중국해안봉쇄와 산업시설 폭격을 요청했다.
그는 12월30일 워싱턴의 합참의장 앞으로 보내는 전문에서 「중공은 이미 戰力의 거의 전부를 한국 전선에 투입했으므로 다른 지역은 취약하게 노출되어 있다」면서 장개석 군대의 활용을 건의했다. 맥아더는 또 지금까지 중공과의 전면전을 피하기 위하여 兵力사용을 자제했는데 이미 전면전이 되었으니 더 이상의 제약이 필요없게 되었다고 지적했다. 그는 또 워싱턴이 검토하고 있는 한국으로부터의 전면 철군 계획에 대해 반대한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그는 한국으로부터의 철군은 여기에 투입된 중공군을, 다른 지역을 침략하도록 풀어주는 결과를 빚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 건의에 대해 미 合參(합참)은 중공이 한국 이외의 지역에 있는 미군을 공격할 때만 중국 본토 공격이 허용될 것이라면서 다른 제안을 전부 거부했다. 1951년 1월14일 트루먼 대통령은 맥아더에게 친서를 보내 한국으로부터의 철수계획을 취소하는 대신에 상황이 불리하면 제주도 등 해안지역을 근거지로 하여 최후 저항을 시도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맥아더는 회고록에서 「내가 가진 군사력을 인위적인 제약 없이 다 쓸 수 있다면 나는 한국을 구하는 것은 물론이고 중공의 전쟁수행 능력에 치명적인 타격을 가하여 다가오는 수 세대 동안 아시아의 평화를 위협하지 못하도록 할 자신이 있었다」고 썼다. 이것이 그의 내심이었고 중공군 개입에 대한 정보판단과 보고도 이 목적을 염두에 두고 이루어졌을 것이다.
1951년 봄 유엔군은, 서울을 점령하고 충청도 부근까지 남하한 중공군을 다시 밀어올릴 수 있게 되었다. 맥아더는 중공본토 공격은 거부되었으므로 한국內 중공군을 전멸시키는 전략을 수립하고 있었다. 회고록에 따르면 그는 방사능 물질을 압록강가를 따라 뿌림으로써 적의 수송로를 차단하고 한반도의 동서해안 맨 北端에 대병력을 상륙시킨 뒤 중공군을 목조르는 작전도 구상했다고 한다.
맥아더는 물론 원자폭탄 사용도 원하고 있었다. 丁一權 회고록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1951년 초 동해안의 양양 전선으로 시찰 나온 맥아더는 丁一權 총장과 둘만 있게 되자 이런 말을 하더란 것이다.
『이제까지 만주 폭격과 원폭 사용을 주장해왔지만 조금도 잘못은 아니다. 원폭이라 했지만, 본보기로 허허벌판에 한 발 터뜨려 보자는 것이었다. 난들 왜 원폭의 가공스러움과 죄악스러움을 모르겠는가. 다만 중공군에 제동을 걸어보자는 것인데, 트루먼은 끝내 거부해오고만 있다. 지금도 늦지 않았는데… 丁장군, 당신도 잘 알다시피 원폭을 그토록 바라고 있는 당신네 李대통령에게 말할 수 없이 미안하오. 만날 때마다 원폭도 不辭한다고 했던 약속이 이처럼 허사가 될 줄은 몰랐다고, 노인에게 전해주시오』
폴 니츠의 증언:맥아더를 감청
丁一權이 생전에 증언한 李承晩-맥아더 두 반공투사의 密約說을 뒷받침하는 자료가 또 있다.
폴 H 니츠가 쓴 「히로시마로부터 글라스노트」란 회고록이 그것이다. 니츠는 미국 외교가의 巨物로서 주로 전략과 정책 수립에 종사해왔다. 딘 에치슨 국무장관 밑에서 정책기획실장 자리에 있을 때 그가 입안한 對蘇전략 기본계획서인 NSC68이란 문서는 「이 전략으로 미국이 냉전에 이겼다」는 평가까지 들을 정도이다. 국무성 정책기획실장 시절에 그는 6·25전쟁을 겪었다. 회고록엔 이런 대목이 있다.
< 내 책상에 올라오는 맥아더의 교신 감청 자료에 의하여 맥아더의 진정한 목표는 중국으로 전쟁을 확대시켜 모택동을 몰아내고 장개석을 복귀시키려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맥아더가 매우 위험한 방향으로 가고 있음이 확실했다. 나는 언젠가는 대통령이 맥아더를 퇴진시켜야 할 것이라고 결론내렸다. 그 일이 아무리 인기없고 어려운 일일지라도>
니츠는 회고록에서 맥아더가 그런 위험한 전략을 추진하고 있는 이유 중의 하나는 그가 원자폭탄의 在庫에 대해서 제대로 보고받지 못한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당시 원자폭탄은 원자력위원회(Atomic Energy Commission)에서 관리하고 있었다. 원폭의 在庫量은 중국본토를 상대로 본격적인 공격을 할 만큼 많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상의 회고록을 종합하면 맥아더가 중공군의 개입 가능성이 없다고 誤判했다는 종전의 평가는 수정될 필요가 있겠다. 맥아더는 중공군의 개입 가능성을 오히려 즐기면서 거대한 도박을 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여기에 李대통령은 편승한 셈인데 전쟁 수행이 맥아더의 계산대로 될 것이라고 믿었던 것이 큰 誤算이었다.
미국은 아시아에서 중공과 전면전을 벌일 경우 소련이 개입할 것이란 우려를 하고 있었다. 아시아에 너무 병력을 집중시키면 西유럽이 위험해진다는 걱정도 했다. 특히 영국이 그 방향으로 미국을 설득했다. 트루먼 대통령은 세계 전체를 보고 미국의 군사력을 배치해야 할 입장이었다. 극동만 보는 맥아더와는 입장이나 시각이 같을 수가 없었다. 맥아더가 대도박에 실패함으로써 한국의 운명도 통일이 아닌 再분단으로 결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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