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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마당

새정부가 들어서면 우리는 물러난다

겉으로는 평온을 되찾아갔다.

그렇다고 해서 문제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조사할 것이 있다고 해서 부하가 상관을 체포하는 것은 용납될 수있는

일인가.  그에 대한 법적 해석은 어떻게 할 것인가.  군 내부에서 갈등

해 온 다른 계통을 제거하고 전군을 장악하기 위한 그런 것이라면

이것은 쿠테타가 아닌가………..


 

 12.12 사태 이후 아버지는 군의 움직임을 비상한 관심으로 바라

보게 되었다.  하극상을 주도한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정치색이 매우

짙은 인물이었다.  더구나 그의 뒤에는 청와대 경호실,수경사, 보안사

등의 주요 직책을 독식했던 ‘하나회’가 있었다.  아버지는 두고두고

이 나라의 운명을 가를 뇌관이 되리라는 불길한 느낌을 받았다.


 

 사실 신군부는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이 시해 현장 가까이 있었다는

점을 빌미로 하극상을 일으켰지만, 사전에 정교한 집권 시나리오를

준비해놓은 상태는 아니었다. 자신들이 권력의 전면에 나설 준비가

될 때까지는 누군가 내세울 사람이 필요했다.  가장 편한 방법은

현재의 대통령을 업고 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10.26사태 직후

김재규가 활개 치는 모습을 보면서도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샌님처럼 꽁하니 앉아있는 최규하 대통령은 그들의 마음에 차지

않았다.  


 

 김재규가 박 대통령은 시해한 뒤 비상국무회의를 소집했던 날,

최규하 국무총리는 저녁 8시 30분경 김재규가 범인이라는 사실을

김계원 대통령비서실장으로부터 전해 듣고도 김재규가 체포될

때까지 4시간 동안 입을 다물었다.  그 일을 빌미로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12.12 이전에 이미 최규하를 체포하겠다는 말까지

했었다고 한다.

 그 무렵 신군부가 관심을 보였던 인물은 부총리인 아버지였다.

10.26 당시 김재규를 붙잡고 대통령이 어떻게 유고하였는지에 대해

꼬치꼬치 캐묻던 당당한 모습이 신군부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것이다.

어떻게든 신현확 총리를 업어야 한다는 논의가 일면서 여러 경로로

아버지에게 의사 타진이 들어왔다.

한번은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아버지에게 대놓고 요청한 적도 있었다.

 “총리님 대통령을 맡아주셔야 되겠습니다.”

아버지는 호통을 쳤다.

 “네가 뭔데 일국의 재상에게 대통령을 맡으라 마라 하느냐,

건방진 놈!”

2월경에는 최규하 대통령을 체포하고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다시

아버지를 선출한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10.26 수습과정에서 김재규

당시 중앙정보부장이 전권을 장악하려 하는 것을 방조했다는 죄목

이었다.  아버지는 군부의 제안을 일축했다.

 

집요할 정도로 계속되는 대권 제의를 단호히 물리치며 아버지는

신군부와 엄격한 선을 그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끊임없이 아버지를

의심했다.  

김종필은 ‘자신을 선거에서 못나오게 한 건 아버지가 욕심이 있어서가

아니냐’고 의심했고

김영삼이나 김대중도 아버지의 말을 믿지 않았다.

안개정국이라는 당시의 혼미한 상황에서 아버지가 신당을 만들 것

이라는 등 전두환과 손을 잡았다는 등 근거 없는 말들이 난무했다.

아버지를 견제하는 건 청와대도 마찬가지였다.

 세상이 어찌나 시끄러운지 하루는 안 되겠다 싶어 모든 신문사의

편집국장을 총리공관에 초대했다.  저녁을 먹은 뒤 이야기를 꺼냈다.

 “내가 지금까지 기본 방향을 몇 번이나 발표했습니까.

새로 헌법 만들어서 새 헌법에 따라 선거해서 정부도 새로, 국회도

새로 구성한다고 분명히 말했는데, 자꾸 앞이 안 보인다고 하면

어떻게 합니까? 누가 당선될지는 선거해봐야 아는 거 아닙니까.

그걸 모른다고 지금 자꾸 ‘안 보인다. 안개정국이다’ 그러면 어쩌란

말입니까.”

아버지는 다시 한번 말했다.

 “현 정부는 관리정부로서 대통령과 나는 엄격히 중립을 지킬 거다.

그리고 새 정부와 국회가 성립되면 우리는 다 물러가겠다. 우리의

주어진 사명을 다 완수하면 우리는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겠다.”

아버지의 진심어린 말을 들은 편집국장들은 대부분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저녁은 그렇게 이야기가 기분좋게 마무리되었다.

그런데 이튿날 청와대에서 비서관 하나가 총리공관에 왔다.

그가 아버지와의 면담을 요청하면서 총리 비서관에게 물었다는 말이

걸작이었다.

어제 신문사편집국장들하고 저녁식사하면서 총리께서

‘우리는 다 물러나겠다.’고 말씀하셨다는데, 이 ‘우리’란뜻이 뭡니까?

그 이야기를 전해 들은 아버지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그 일과 관련해서 아버지가 내게 했던 말을 그대로 옮겨본다.

    내가 ‘우리’라는 말을 했을 때는 나도 생각이 있지.

    ‘최규하,신현확’그런 의미에서 내가 ‘우리’라고 그랬다 이말이야

그런데 청와대에서 총리공관에 사람을 보내 ‘우리’가 무슨 의미냐

하는 것은 ‘네 말을 하면 했지 왜 최대통령을 끌고 들어가느냐’

이 말이란 말이야.  그 건 벌써 청와대에 가서 몇달 해보니 처음하고

생각이 달라졌다 이 말이지. 처음엔 대통령 안 하겠다고 그런 사람 아니냔 말이야.  그래서 내가 화가 올랐단 말이야.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가라고 그래! 내가 소리를 질러버렸다.


 

 최 대통령에 대한 개인적 실망에도 불구하고 나랏일은 계획대로

진행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아버지의 신경을 건드린 것은

정치적 야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신군부였다.  

1980년 2월 중순경, 아버지는 최규하 대통령에게 말했다.

 “지금 10.26 사건 이후 몇달째 중앙정보부장이 공석인 상태입니다.

쑥대밭이 된 중앙정보부를 정비하고, 국가 안위를 위해서라도 빨리

후임을 임명하셔야 합니다.  중앙정보부는 대통령 직속으로 돼

있어서 총리는 관여하지 못하게 돼 있습니다. 중앙정보부장은

절대 군인으로 임명하지 마시고 민간인으로 임명하십시오. 보안사와

정보부를 양립시켜 정보를 복수로 컨트롤하셔야 합니다.”

일주일이 지났는데도 임명에대한 아무 소식이 없었다.  똑 같은

얘기를 두 차례나 더 했다.  그러자 미국의 시사주간지[타임]에

기사가 실렸다.

 ‘최규하 대통령이 중앙정보부장을 군인으로 임명하려고 하는데,

신현확 총리가 민간인으로 해야 한다며 반대를 해서 임명이

늦어지고 있다’

 “허!”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청와대에서 배석자도 없이 대통령과 단

둘이 이야기한 내용이 이떻게 저리도 정확하게 보도될 수 있나!

 ‘저 쪽에서 일부러 흘리고 있구나…..’

이런 언론플레이를 통해서 아버지를 누르고 견제하는 한편,

자신은 신군부에 한층 가깝게 닥아가려는 목적으로밖에는

해석되지 않았다.  그 뒤로 아버지는 청와대의 일에 일절 관여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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