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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마당

이건 내란!

1979년 12월 12일 저녁이었다.

최규하 대통령의 지시로 내각 편성안을 만든 아버지는 저녁 8시경

최종 명단을 가지고 삼청동 총리 공관으로 갔다.

아버지는 며칠간 플라자호텔에 머물며 사람들을 만나기도 하고

대통령과 상의하기도 하면서 비밀리에 내각을 편성해왔다.


조각의 마무리를 위해 대통령과 마지막 마무리를 하고 있을 때였다.

전두환 보안사령관 겸 합동수사본부장이 결재받을 것이 있다며

대통령 집무실을 찾아왔다. 말이 결제 요청이지 황영시 1군단장

차규헌 수도군단장 유학성 국방부 군수차관보 박희도 공수여단장 등

군복 입은 무리들을 우르르 이끌고 들어오는 품이 무력시위나 다름

없었다.


 “무슨 결제입니까?”

 “정승화 총장 체포 건입니다.”

 “이게 무슨 소리요?”

 “전 본부장, 지금 제 정신으로 하는 말이오? 아니, 상관인 정 총장을

체포하겠단 말인가?”

 “박 대통령 각하의 시해 사건을 수사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습니다.

체포조가 출동했으니 상황은 이미 끝났을 검니다.  늦었지만 여기에

사인해 주십시오.”

 “왜 사전 결재를 받지 않고 일을 이런 식으로 처리하는 거요?

문제를 일으켜놓고 사후결제를 받겠다는 게 말이나 되는 소리요?”

옥신각신 언쟁이 벌어졌다.  최규하 대통령도 불쾌한 얼굴로,

 “왜 정차를 무시하고 연행부터 하나? 앞뒤가 전도돼도 유분수지…”


 전두환 측과 언쟁을 벌이는 동안 비서실을 통해 심상챦은 보고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지금 서울 시내는 00부대가 점령했고, 국방부에서 총격전이

벌어졌다고 합니다.  또 00에서도 총격전이 벌어지고 있다는 ….”

생각보다 훨씬 더 심각한 상황이었다.  국정을 정상화하려고

동분서주하는 사이에 군에서 이런 반란의 씨앗이 자라고 있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전두환 소장이 국민 앞에 등장한 것은 10.26 직후 비상계엄이 선포

되면서였다. 정승화 뮥군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에 의해 합동수사

본부장에 임명된 그는 ‘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은 김재규 중앙

정보부장의 단독범행이라고 수사 결과를 발표했다.

그러나 정 총장 측과 전두환 신군부 사이에 균열이 깊어지면서

‘같은 궁정동 울타리에 있던 정승화가  김재규의 저격 사실을 진짜

몰랐을까’,

‘김재규와 함께 차를 타고 육본으로 이동한 뒤 그를 신속하게 체포

하지 않은 데에 다른 이유는 없었는가’

하는 의문이 또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노재현 국방장관에게 정승화 총장 연행 조사

를 건의했으나 노 장관은 시국이 불안해진다는 이유로 수락하지

않았다.  한편 합동수사본부가 자신을 겨냥하고 있음을 눈치 챈

정승화 총장은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12월 13일자로 동해안경비

사령관으로 발령내려 했다.  그런데 그 정보가 보안사령부에 포착

되었고 사전재가도 없이 정 총장을 체포하는 12월 12일의 하극상이

벌어진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군 내부의 문제로 끝날 일이 아니었다.

“국방부 장관을 찾아서 결재를 받아 오시오.”

“지금 연락이 안 됩니다. 어디 계신지 모르겠습니다.”


정 총장이 체포되니 현 육군지휘부에서 저항이 발생하고 그걸

진압하기 위해 전두환 측의 수도경비사령부와 9사단이 이미

한강다리에 진입했다.

 “이건, 내란 아닌가! 이러다 북한이 밀고 내려오기라도 하면 어쩌러고 이러나?”

한편 노 장관은 국방부에서 지금 총격전이 벌어지고 있어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할 수 없이 신현확 국무총리가 노장관을 데리러 갔다.

차를 타고 종각 부근으로 나오니 탱크가 막아섰다. 병사들은 아버지가

탄 차문을 열어젖히며 총부리를 들이댔다.

 “나 국무총리 신현확이다.”

 “돌아가십시오!”

 “저희들은 상부 명령을 받고 있어서 어쩔 수 없습니다. 돌아가십시오!”

바리케이트를 통과할 때마다 비슷한 소동이 벌어졌고, 결국 대대장,

사단장에게 확인을 받은 뒤에야 국방부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 때가 새벽 3시 50분경이었다. 국방부 현관은 총격전으로 인해

모두 부서지고 사방에 유리 파편이 낭자했다.  국방부의 처참한

모습은 군 지휘계통이 흔들리고 수도 방위체계에 허점이 생긴

상황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자, 양쪽이 같이 앉아서 사태 수습책을 의논하시오.

어떻든 내란은 종식돼야 합니다.”


 신군부와 기존 군부의 합의 내용은 현 군부체제를 유지하고

서로의 안전을 보장한다는 것이었다.  전두환 사령관은 김재규의

진술과 정승화 총장의 혐의 사실을 들먹이며 체포를 추인해달라고

끝까지 고집을 피웠다.

 게다가 노재현 국방부장관은 벌써 수사착수 건의서에 사인을 한

뒤였다.  나중에 알고 보니 노 장관은 아버지의 승용차를 뒤따라

총리공관으로 차를 몰다 무장병력에 의해 보안 앞에서 하차를 당했다.

 수사 착수 건의서에 견재한 후 총리공관으로 온 노 장관은 대통령

에게도 재가를 건의하여 아버지를 허탈하게 만들었다.  

무력시위를 하는 전두환에 맞서고  새벽까지 버티어왔는데 군부를

책임지는 장관이 어쩌면 저렇게 유약할 수가 있는지 아연할 따름

이었다.  

최규하 대통령은 결국 서류에 사인할 수밖에 없었다.

그 때가 12월13일 새벽5시 10분경이었다.

그는 재가 서류에 ‘CHOI’흘러 쓴 자신의 사인을 한 뒤 그 밑에

일자와 시간을 적어놓는 것으로 자신의 반대의사를 간접적으로

표시했다.  


훗날 최규하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

 당시 사전 재가 없이 정총장을 연행한 것은 불법이라고 생각했고

 12월13일 새벽에 더 큰 혼란과 희생을 방지하기 위해 불가피하게

 사후에 재가를 할 수 밖에 없었고, 장시간 고민끝에 어쩔 수 없이

 재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