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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마당

대한민국 관료들에게


'진짜' 법의 정신


아버지는 파면되고도 남을 만한 일을 여러 번 저질렀다.  

1953년 공업과장 시절의 만행(?)이 대표적인 일이다.

서울로 환도한 뒤 일을 하려고 보니 행정의 기초라 할 수 있는

통계가 하나도 없었다.  전국에 섬유공장이 몇개나 있는지,

고무공장의 생산 능력은 어떤지, 전쟁으로 얼마나 망가졌는지?

수리는 어느 정도 필요한지를 알아야 했다. 전국의 공장에 현황을

묻는 공문을 보냈지만 답신이 온 것은 백에 한두 건 뿐이었다.


 직접 현지에 가서 조사하는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출장비로 책정

된 돈은 실제 필요한 액수의 3분의1밖에 되지 않았다.  규모를 축소

하고 다시 경비를 계산해 보았다.  공업국 전체의 1년 출장비를 조금 상회하는 액수가 나왔다.  현지 조사에 1년치 출장비를 모두 쓰면

아쉬운 대로 해볼만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식으로 경비를 처리하면 분명히 나중에 문제가 생길 텐데…”

 “그렇다고 일을 안하고 앉아 있을 겁니까” “나랏일을 해야 할 게

아닙니까?  문제가 생기면 제가 책임질 테니 무조건 하고 봅시다.”

전국 각지로 나가 실태를 파악하였고  계획을 수립할 수 있었다.

그런데 감사에서 우려했던 일이 벌어졌다.  1년 출장비를 석 달만에

모두 써버린 사실이 드러났다. 경비사용보고서인 심계서를 곧이곧

대로 작성해서 제출한 것이 문제라면 문제였다.


심계원에서 아버지를 호출했다.  

“신과장, 당신이 이렇게 하라고 지시했다는 게 사실이오?”

“이거 전부 위법행위요. 알고 했습니까?”

“이렇게 안하면 일이 안 되는데 그럼 어떻게 합니까?  국가 위기를

보고 앉아 있어야 합니까? 나라가 망해가는 판에 그까짓 법규가

문제입니까?”

“그러면 당신을 처벌해도 좋습니까?”

“처벌하려면하십시요.  나는 잘못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처벌 받을 때 받더라도 국가의 일은 어떻게든 되게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당시 노진설 위원장은 휴하고 한 숨을 쉬더니 말했다.


 “그러면 이렇게 합시다.  돌아가거든 장관에게 얘기해서

제출한 보고서를 철회하고 다시 제출하겠다는 공문을 하나

보내주시오. “

“그렇게 못하겠습니다.”

“왜 못하겠다는 거요?”

“새로 써도 똑 같이 사실대로 쓸 건데 뭐하러 철회합니까?”

“저는 못하겠습니다.”

이후에도 몇차례 더 아버지를 불렀다. 그러나 아버지는 버텄다.

결국 철회공문을 보내지도 않았는데 심계서가 되돌아왔다.

심계원은 미 문제를 불문에 부쳐버렸다.  훗날 아버지는 이렇게

말했다.


 그런 식으로 사는 시대가 있었다.  법을 어긴 것은 사실이지만

잘못했다는 생각은 없었다. 국가를 위해서 한 것이니까.  

국가 위기 상황에서는 형식적인 성문법을 지켰느냐 못지켰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무엇이 진정으로 국가와 국민을 위한 일인가를

기준으로 행동하는 거야.  나는 법을 전공한 사람이지만 그게

진짜 ‘법의 정신’이라고 생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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