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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마당

비상계엄

비상계엄?제주는 빼야하는 이유


2014년 3월 20일 37년만에 공개된 미 국무부 2급 비밀 전문에

의하면 박정희 대통령은 김재규 부장에게 피격된 직후 미국인이

운영하는 병원에 먼저 이송된 걸로 보인다.

이 사실을 미국 측에 전한 사람은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이었다.

최 대행은 10월 27일 오전 8시 글라이스틴 당시 주한 미국대사에게

전화해 “박대통령이 국군 수도통합병원에 후송되기 직전 미국인이

운영하는 병원에 후송해 사망통보를 받았다”고 전했다.


이는 박 대통령이 피격된 직후 국군통합병원에 후송됐으나 병원

도착 직전 사망했다는 정부의 공식발표 내용과 전혀 다른 내용으로

아마도 최 대행은 박 대통령 시해에 미국이 개입됐을 거라는 추측을

차단하기 위해 이 사실을 숨긴 것으로 보인다.


최규하대행이 김계원 실장으로부터 김재규가 시해범이라는 사실을

제일 먼저 보고를 받았는데도 그가 체포될 때까지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은 사실에 대해서는 두고두고 분개해 마지 않았다.

대통령이 서거했을 때도 자신이 권한대행이라는 자각도 없었고,

서거 사실을 보고받은 오후 8시30분부터 오전 12시 30분까지

4시간 동안 총기를 휴대한 범인과 우왕좌왕하는 국무위원들을

그대로 지켜보며 방관했다는 것이다.


어쨌던 김재규 부장이 체포된 뒤 최규하 국무총리와 신현확 부총리,

노재현 국방, 구자춘 내무, 김성진 문공부 장관 등 5명은 김계원

실장을 앞세우고 대통령의 시신을 직접 확인하기 위해 국방부를

나섰다.


병원장은 일행을 병원 내의 작은 방으로 안내했다.

진료용 침대에 머리부터 발끝까지 흰 천으로 덮힌 시신이 있었다.

병원장은 머리를 덮은 흰 천을 천천히 걷어냈다. 잠든 것처럼 눈을

감은 대통령의 얼굴이 드러났다.  얼굴이 약간 부어 있을 뿐 겉으로

보이는 모습은 상처 하나 없이 깨끗했다. 국무위원들의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  마지막 인사를 하듯 시신 앞에 고개를 숙였다.


이날 밤의 혼란 상황에서 신현확 부총리는 침착하고 차분하게

내각의 중심을 잡았다.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며 “빨리 비상계엄을

선포해야 한다.”고 국무위원을 다그치는 김재규에게 대통령 유고의

내용을 자세히 밝히라고 호통을 쳤고, 그의 체포를 지시했으며,

국무위원들을 이끌고 병원에 가서 시신을 확인까지 하고 왔다.


 이제 비상계엄 선포를 의결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해야 할 일이

있었다. 부총리는 최규하 총리를 잠시 옆방으로 불러냈다.

 “왜 그러십니까?”

 “비상계엄 말입니다. 제주도는 빼야 합니다.”

 “제주도는 왜요?”

 “전국계엄이 되면 모든 정부의 행정기관이 계엄사령관의 지시를

받고 계엄사령관은 대통령의 명령만 받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행정이 아무 기능도 못하고 군정이 되기 쉽습니다.  

제주도를 제외한 부분계엄이 되면 계엄사령관은 국방장관의 통제를

받게 됩니다.”

 “아, 그렇습니까? 알겠습니다.

최규하 총리는 외무고시 출신으로 평생 외교 계통에서 일해온

훌륭한 관료였지만 난국을 헤쳐갈 위기관리능력이나 현실정치

감각이 부족했다.  


신현확 부총리의 사회로 국무회의가 진행되었다.

국무회의는 새벽 4시를 기해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기로 의결하고, 계엄사령관에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임명했다

비상계엄을 부분계엄으로 정환한 것은 이후 현 정부의 체제대로 정국

을 안정적으로 이끌어나가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부총리가 보기에 대통령은 매우 영민하고 현명한 분이었다.

하지만 집권 후반기로 갈수록 중심이 흐트러지고 판단력이 흐려진다

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장기집권의 폐해일까.  언제부턴가

대통령은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는 생각하지 않으려 했다.

어쩌면 신현확 씨와 정반대 스타일인 최규하 씨를 총리로 임명한

것도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고인 물은 썩기 마련이다. 집권을 오래하면 결국 주위에 받들어

모시는 사람만 남게 된다.  누구를 막론하고 다 마찬가지다.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차지철 경호실장 같은 이들을 곁에 것부터가

잘못된 일이었다.  서로 그렇게 견제하고 경쟁하던 두 사람의 인연은

각각 불귀객과 대통령 시해범으로서 파국을 맞게 되었으니.


 당시 부총리 자문역이던 김기환 박사는 훗날 한 인텨뷰에서

 “10.26사태는 3공화국 정권의 경제적 실패가 빚어낸. 역사적으로

필연성을 띤 사건이었다.  특히 10.26의 도화선이 된 부마사태는

박 정권하 경제정책의 한계에서 비로된 것이다. “라고 지적했다.

중화학공업에 치중하다보니 1975-1977년 섬유산업에 대한 은행

대출이 전체의 40-50퍼센트로 줄고 말았는데,  그 결과

노동집약적인 중소기업들이 몰려 있던 부산과 마산지역에서부터

반정부 시위가 터졌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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