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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마당

전부총리 신현확의 증언에서

1960년, 서대문형무소에는 간첩사건으로 들어온 사람이 많았다.

내 방에도 2명이 있었는데, 그 중 하나가 서울대 문리대를 졸업하고

월북해 김일성대학을 다시 졸업한 인물이었다.

5년 동안 밀봉교육을 받은 그는 남파된 뒤 학생조직에서 활동하다가

잡혀 왔다.  그는 단언하듯 말했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늦어도 한두달 안에는 다 뒤집어

   집니다. “  

똑같은 수인의 몸이지만 그는 세상 돌아가는 사정을 훤히 꿰고 있었다.

형무소 안에서 어떻게 담장 밖의 정보를 얻는 것일까?

바로 목침을 이용한 통방通房, 이웃한 감방의 수감자끼리 암호로

소통하는 것이다.  당시 서대문형무소에는 방마다 2개씩 목침이

있었다.  이 목침을 벽에 대고 통통 소리나게 치면 저쪽 방에서 목침을

밴 후 누운 자세로 귀를 기울인다. 그러면 이쪽에서 말하는 소리가

마치 수화기에서 흘러나오는 것처럼 들린다. 그러면 다시 저쪽에서

통통하고 친 뒤 이쪽을 향해 말을 하는 것이다.

 “아이고, 이러다 나라가 뒤집어지겠구나!”

다른 방에 수감된 국무위원들도 운동시간에 만나면 다들 이 나라가

언제 뒤집어질가를 걱정했다.


 그러던 중에 5.16이 터졌다. 그 소식을 들은 모두가 만세를 불렀다.

군사혁명의 주체가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적화의 가능성은

사라졌다는 안도감이 들었다.  그러나 새로이 정권을 장악한 5.16

주체세력은 혁명재판소라는 걸 만들더니 부정선거 관련자들에 대한

조사를 다시 하겠다고 나섰다.

 지루한 법정 공방도 끝이 나고 검찰의 구형과 재판관의 선고만

남았다.  9월 11일은 월요일, 그 해 봄, 나는 혜화국민학교 1학년이

되었지만 중요한 재판에는 빠짐없이 참석했다. 아버지 말씀대로

10킬로그램이 넘는 녹음기를 들고 어머니와 함께 법정에 들어섰다.


 이틀 전, 내무부 관계 재판에서 최인규 내무부장관과 이강학

치안국장이 사형을 구형받았기 때문에 불안감이 가족들을 얼어

붙게 만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혁명검찰은 자유당 기획위원

한희석,박용익,이존화 등 세 사람에게 사형을, 이재학에게 무기징역

을 구형하였다.  8명의 국무위원들에게는 징역7 - 15년이 구형되고

아버지 (신현확)의 구형량은 징역 10년이었다.


 한국의 형사소송법에는 선고를 하기 전 피고인에게 최후진술을

할 기회를 주어야 한다고 규정되어 있다. 재판장에 불려간 국무위원

들은 서열에 따라 한사람씩 최후진술을 했다. 부흥부는 서열상 맨

마지막 순서였다.


 “재판장님, 나쁜 의도로 한 일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다 선의로

했습니다.”


 “재판장님, 형무소에서 많은 반성을 했으니 부디 선처해주십시요.”


맺음말은 하나같이 “관대하게 처분해주십시오.”였다.

어느 국무위원은 황당무계한 소리를 늘어놓으며 선처를 호소했다.

 “재판장님, 저는 절대 자유당 정권을 지지한 일이 없습니다.

저는 장 면 씨 지지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에게 재일 아부 잘하고 엉망진창으로 굴던 사람이었다.

아버지가 혐오하는 것은 인간성의 바닥을 목도하는 일이었다.


드디어 아버지 차례가 왔다.  아버지는 재판부가 앉은 법대를

곧은 눈으로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자유당 정권에서 조직적인 선거 부정이 이뤄진 것은 사실이고,

그것 때문에 나라가 뒤집어지고, 정권이 무너진 것도 사실이오.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 자유당 정권의 국무위원을 지낸

사람이 책임을 지지않으면 과연 누가 책임을 진단 말이오.

나는 국무위원의 한 사람으로서 책임을 져야 되겠소.

나에게 중형을 내리시오!  

사형을 언도하시오!

어느 쪽이라도 나는 그만한 책임이 있다고 인정하고 달게 받겠소.  그런데 그러면 됐지, 내가 모르는 것을 알았지 않느냐,

내가 안 한 것을 했지 않느냐, 그런 것은 만들지 마시오.

내가 몰랐다고 한 것은 모르는 것이고,

하지 않았다고 한 것은 하지 않은 것이오.

마지막으로 한마디만 더 하겠소.  이 세상에 있을 수없는 가정을

하나 하겠소.



만일 2년 전으로 돌아가 국무위원으로 일할 기회가 다시 한 번

주어진다면 나는 지금까지 해온 것과 똑같이, 그대로 하겠소.”


아버지의 최후진술이 끝나자 장내에는 숙연한 침묵이 이어졌다.

판사도 검사도 방청객도 한동안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릴녹음기는 내 옆에서 쉼 없이 돌아가고 있었다.

나는 눈물이 떨어지는 어머니의 손등에 내 작은 손을 올려놓았다.

어린 나이라 최후진술 내용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었지만

아버지가 떳떳한 사람이라는 사실은 알 수 있었다.  

아버지가 내게는 법대 위에 앉아 있는 재판장보다 더 높아 보였다.


                     신현확의 증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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