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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요수상과 그의 친구

싱가포르엔 영국 식민지 행정기구에서 만든

부패조사국(Corrupt Practices Investigation Bureau: CPIB)이 있었다.

李光耀는 이 기구에 反부패 척결의 全權을 맡겼다.

부패혐의자 및 그 가족의 은행기록을 열람할 수 있는 권한을 주고

부패를 입증할 수 있는 증거의 범위를 넓혔다.

1960년에 법원은 자신의 월급에 비해서

지나친 호화생활을 하는 것 자체를 부패의 증거로 인정하기 시작했다.

李光耀는 자신의 친구나 장관들에 대한 수사를 막기는커녕 장려했다.

1986년에 국가개발장관 테칭완이 수뢰혐의로 조사를 받게 되었다.

테칭완은 무고하다면서 이광요 수상을 독대하고 싶어했다.

이광요는 수사가 끝날 때까지는 만나지 않겠다고 거절했다.

그 며칠 후 테 장관은 유서를 남기고 자살했다.

유서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명예를 존중하는 동양의 신사로서 나는 나의 잘못에 대하여

가장 비싼 代價를 지불하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유족들은 문상온 李 수상에게

故人의 명예를 위해서 부검만은 하지 않도록 해달라고 부탁했다.

李 수상은 剖劍을 하지 않으려면

자연사를 했다는 의사의 사망진단서가 있어야 한다고 대답했다.

의사는 테 장관이 독약을 먹고 자살했다는 소견서를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