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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의 처리 -ㅡ차분한 공감

[조성호의 심리학 카페]공감잔치는 끝났다

최종수정 2017.07.12 13:10 기사입력 2017.07.12 13:10


 1. 버락 오바마와 빌 게이츠의 진실 혹은 거짓 

공감이 병든 사회를 치유할 수 있는 유력한 인간 덕목이라는 데에는 이견이 있을 수 없다. 버락 오바마 전 미국대통령은 프란치스코 교황을 만난 자리에서 "사람들이 서로 증오하고 전쟁에 빠져드는 이유는 공감 부족 때문"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리고 그는 8년 동안의 대통령 재임 기간 내내 공감의 중요성을 역설하곤 했다.  

마이크로소프트사의 창설자이자 세계 최고 갑부인 빌 게이츠 역시 스탠포드 대학교 졸업식에서 좀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공감 능력을 확장시킬 것을 졸업생들에게 당부한 바 있다. 그의 연설이 같은 대학에서 행해졌던 스티브 잡스의 명연설에는 못 미칠지 몰라도, 배움의 울타리를 벗어나 적자생존의 삭막한 경쟁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과제에 직면한 졸업생들에게는 사뭇 색다르게 다가왔을 것이다. 경쟁 대신 사랑을 강조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필자는 다소 어리둥절하다. 왜냐하면 온갖 심리학 연구들은 사랑과 자비를 베푸는 사람들보다는 자신의 이익을 더 중시하는 사람들이 직업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성공 확률이 더 높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영국 최고 경영자들의 성격특성을 분석한 한 심리학 연구에서는 임원승진 대상자 가운데 적지 않은 수가 사이코패스인 것으로 드러났다. 이는 미국의 성공한 기업가들을 대상으로 한 연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높은 지능과 자기포장으로 사람들을 기만하고 조종하는 이들은 '화이트칼라 사이코패스' 혹은 '양복 입은 뱀'으로 불린다. 이들은 잔혹한 범죄를 저지르지는 않지만 타인의 고통과 함께 하거나 타인을 위해 눈물을 흘리지는 않는다. 이들은 철저히 자기중심적이며 철저히 비공감적이다. 바로 이런 특성을 가진 사람들이 성공하는 시대가 현대일진데, 버락 오바마와 빌 게이츠는 어떻게 해서 세계 최고의 권력과 부를 손에 넣을 수 있었을까?

 2. 하늘은 공감하는 자를 돕지 않는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속담이 있다. 틀린 말이 아니다. 그렇다면 '하늘은 다른 사람을 돕는 자를 돕는다'는 말은 어떨까? 세상의 모든 윤리 교과서들이 이 말이 온전한 진실이라고 가르칠지는 몰라도, 최소한 심리학적 견지에서 보자면 그리 타당하지는 않아 보인다. 왜냐하면 사람들 사이의 심리적 교류가 늘 공평하게 이루어지지는 않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여성은 남성에 비해 우울증에 걸릴 확률이 2~3배 정도 더 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그렇다. 이유는 여성들이 남성들에 비해 타인을 공감하려는 경향성이 더 높기 때문이다. '공감의 시대'라는 책의 저자이기도 한 프란스 드 발은 일생동안 영장류 행동을 연구한 것으로도 유명한데, 그가 내린 결론은 지극히 당연한 동시에 매우 주목이 간다. "쥐가 됐건 코끼리가 됐건, 새끼를 가진 어미는 새끼의 고통과 정서에 매우 민감할 수밖에 없다."

이어령 선생은 어느 글에서 "어머니는 자연적 존재이지만 아버지는 사회적으로 창조된 존재"라고 말한 바 있다. 낳자마자 자녀를 양육해야 하는 어머니들은 어느 정도 자란 자녀들을 사회적으로 교육시키는 아버지들에 비해 자녀의 고통과 정서에 더 민감할 수밖에 없다. 동물이든 사람이든 어미들은 아비들보다 더 공감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바로 이런 역할의 차이에 따른 공감 정도의 차이가 여성과 남성간의 우울증의 차이를 설명해준다. 더 많이 공감하는 여성이 더 우울해지는 것이다. 

사람의 뇌에는 타인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처럼 느끼게 해주는 거울 뉴런이라는 신경세포가 있는데, 이 신경세포가 더 많이 활동할수록 주관적으로 경험하는 고통도 더 커지게 된다. 또한 타인의 고통을 지각할 때 뇌에서는 '옥시토신'이라는 화학물질이 분비되는데, 이는 아기가 울 때 어머니의 뇌에서 분비되는 옥시토신과 동일한 것이다. 거울 뉴런의 활동과 옥시토신의 분비로 인해 타인의 고통이 그저 남의 일이 아니라 자신의 일이 되게 되는 것이다.

공감을 더 많이 할수록 정서적 고통이 더 커진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예를 들어, 일련의 심리학연구들에서는 페이스북과 같은 소셜네트워크서비스 상에서 친구들의 스트레스나 고민을 더 많이 접하는 사람들일수록 주관적으로 경험하는 고통이 더 커진다는 것을 밝힐 수 있었다. 공감에는 그만큼의 대가가 따르는 것이다.  

사랑도 마찬가지다. 대중가요들은 사랑은 아낌없이 주는 것이라고 노래하지만, 거기에는 응당한 대가가 반드시 뒤따른다. 셰익스피어는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열정적인 사랑의 끝 모습이 어떨 수 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줄리엣의 죽음을 목도한 로미오는 다음과 같이 외친다. "눈이여 보아라. 마지막이다. 팔이여 마지막 포옹을. 생명의 창인 입술이여 고결한 입맞춤으로 닫히고 죽음의 신과 영원한 계약을 맺으리. 내 사랑을 위해서. 마지막 입맞춤을 하고 나는 죽으리." 


 3. 공감 잔치는 끝났다 

어떤 사람들은 천성적으로 타인의 고통에 더 예민하게 반응하고, 그 결과로 더 불행해진다. 이유는 이들의 관심이 주로 타인을 향할 뿐 자신에게는 향하지 않기 때문이다. 자신 혹은 타인을 위해 쓸 수 있는 관심의 총량을 100이라 한다면, 이들은 거의 80~90% 정도를 타인의 마음을 헤아리는 데 사용한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감정이나 고통을 돌보는데 쓸 수 있는 마음의 여력은 그만큼 줄어들게 된다. 심리학 영역에서 이런 사람들의 특성은 최근에야 주목받기 시작했다. '병리적 이타주의' 혹은 '공감과다 증후군'이라고 불리는 이런 사람들의 주된 특징은 타인을 공감함에 있어 자기-조절이나 통제가 전혀 행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 다른 어떤 사람들은 개인적 특성 때문이 아니라 자신이 처한 위치나 역할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감정을 더 많이 헤아리기를 요구받는다. 신자들의 고백을 들어줘야 하는 성직자들, 정신건강상의 문제를 가진 사람들을 치료해야 하는 상담전문가들, 온갖 무리한 요구나 불만을 쏟아내는 고객을 상대해야 하는 서비스직 종사자들이 대표적이다. 문제는 이들이 행하는 '감성 노동'으로서의 공감이 심리적 소진이나 우울, 짜증, 분노 등의 정신건강 상의 문제를 초래하기기 쉽다는 것이다. 

최근 들어 심리학자들은 '공감은 무조건 바람직한 것'이라는 일차적 등식 관계를 인정하지 않는 추세다. 공감은 바람직할 것이라는 사회적 통념과는 달리, 공감에는 분명한 한계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공감의 종말'이라는 책에서 폴 블룸은 "공감은 훌륭한 인품의 전제조건이 될 수 없다"고까지 말하기도 한다. 그 이유로 그는 공감과 관련한 두 가지 제한적 측면들을 제시했다. 첫째는 사람들은 아무나 공감하는 것이 아니라 매력적이거나 자신과 비슷한 사람들을 더 공감한다는 것이고, 둘째는 공감이 익명의 대중들을 지향하기 보다는 자신과 인연이 있는 특정한 몇몇 사람들에게로 집중되는 경향이 있다는 점이다. 이런 점에서 블룸은 공감은 편향적인 동시에 협소하기까지 하다고 주장한다. 


 4. 새로운 잔치를 위하여 

블룸의 주장대로라면 공감 잔치는 끝났다. 공감을 신성시하는 시대는 저물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희망을 버리기에는 아직 이르다. 비장의 대비책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필자의 지인이 응급실에 입원했을 때 필자는 두 종류의 의료진을 접할 수 있었다. 한 부류는 불친절했고, 또 다른 부류는 거리를 유지했다. 이 두 부류 모두 필자가 느끼는 걱정과 염려, 불안과 혼란을 적극적으로 같이 느끼고 공유하지는 않았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었다. 전통적인 의미에서 보자면 이들은 모두 비공감적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처음에는 이 두 부류의 차이를 구분할 수 없었다. 하지만 나중에는 분명하게 구분할 수 있었다.  

불친절했던 의료진은 필자를 더 동요시켰지만, 거리를 유지했던 의료진은 그렇지 않았다. 비록 적극적으로 필자의 고통과 혼란을 어루만져주지는 않았지만, 환자의 현재 상태와 앞으로 행해질 처치와 그 효과에 대해 담담하게 설명해주었다. 그리고 궁금해 하는 사항들에 대해 침착하게 답해 주었다. 놀라운 사실은 필자와 다소 거리를 두는 듯한 이 의료진의 객관적 태도가 필자를 상당 부분 진정시켰다는 것이다. 그 거리 위에서 그 의료진이 필자에게 제공한 것은 자신의 전문성이었던 것이다. 이를 냉담한 공감이라 부를 수는 없다. 대신에 차분한 공감이라고 부를 수는 있을 것이다. 

어느 주말에 결혼식에 갔다가 친척 누님 한 분이 했던 이야기가 지금도 귓가를 맴돈다. 그 누님은 결혼식을 올리는 신랑 신부를 보면 기쁘기보다는 슬프다고 했다. 결혼식의 축하 분위기와는 너무 다른 말이어서 그냥 듣기만 했지만 여운은 오래 갔다. 사랑의 백년가약을 맺으려는 두 젊은 남녀에게서 느끼는 슬픔이란 어떤 것일까? 그에 대한 대답은 아직도 내놓기 어렵지만, 이 신혼부부가 함께 살아가는 동안 서로에게 발휘해야 할 공감의 성질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분명하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뜨거운 공감보다는 차분한 공감이 서로를 훨씬 더 진정시켜줄 수 있을 것이라고 말이다. 그 누님이 말했던 슬픔이란 그것을 깨닫기까지 겪어야 할 사랑이라는 이름의 질곡에 관한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조성호 (가톨릭대학교 심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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