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선 정치적으로 대단한 감각을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우리 국민의 인정주의와 연고주의, 그리고 국민 정서의 맥을 놀라울 정도로 꿰뚫고 있는 사람이다. 그래서 「感(감)의 정치인」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정치분야를 제외한 경제, 외교, 안보, 문화 등 다른 분야는 식견이 부족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오랜 야당 생활과 반독재 투쟁에 헌신하느라 별로 공부할 틈이 없었을 것이다. 그를 취재하면서 그의 교양이나 식견 부족을 엿볼 수 있었다. 이런 사람이 대통령이 됐을 때 나라에 얼마나 큰 폐해를 입히는지를 목격했다』 (중앙일간지 前 정치부장)
『그는 야당 지도자로서 반독재 및 민주화 투쟁으로만 점철된 인생을 살아왔다. 국민들이 너무나 잘 아는 민주화의 기수, 투쟁의 기수였다. 그의 인생 역정중 군사정권 때까지 그가 한 역할에 박수를 보내지 않은 국민이 있을까.
『민주화 투쟁은 사실 YS가 했다. 우리나라 민주화를 위해 정말 큰 용기를 보여준 사람이다. 역사의 큰 고비마다 YS가 있었다. 아무리 복잡한 상황이라도 이를 단순화시켜서 명쾌하게 돌파해나가는 능력이 있는 사람이다. 보스의 자질이 있다. 진정한 의미의 문민 정부를 염원하는 국민들의 바람에 부응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정말 머리는 빌릴 수 있는 거 아니냐고 생각했다』(중앙일간지 차장)
기자가 만나 본 대부분의 사람들은 金泳三 전 대통령이 우리나라 민주화를 위해 헌신한 사람이라는 데는 일치된 견해를 보였다. 그러나 대통령으로서의 자질에 대해서는 다소 상반된 견해를 나타냈다. 月刊朝鮮의 설문조사에서도 응답자 1백11명중 58명이 대통령감으로서 능력을 갖추었다는 쪽으로, 52명이 능력이 부족했다는 쪽으로 답했다. 1명은 기타의견을 냈다.
언론은 金泳三씨를 어떻게 보도했고, 언론이 그의 대통령 당선에 어떤 역할을 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서 대부분의 기자들이 당시 언론의 공정성에 의문을 표시했다. 月刊朝鮮의 설문에서도 정치부 기자 10명중 9명꼴로 「언론이 金泳三씨를 실제 모습보다 美化해 보도한 측면이 있다」고 답했다. 金泳三씨의 실제 모습은 그렇지 않았는데 언론이 그의 허물을 감춰주거나 다소 美化해서 보도하는 바람에 대통령에 당선되는데 큰 작용을 했다는 얘기이다. 당시 언론이 무엇을 잘못했느냐는 질문에 기자들은 金泳三 전 대통령의 자질과 능력을 제대로 검증하지 못했거나 자질을 왜곡보도했다는 점을 가장 많이 지적했다. 과거 민주 투사로서 그의 이미지를 과장 보도했다는 지적도 있었다
失言에 대한 언론의 시각
1992년 大選때 그의 유세 과정을 소개한 月刊朝鮮 1993년 1월호는 당시 金泳三 후보의 失言과 실수를 모아놓고 있다.
< 『부의 세습을 막아 경제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양도소득세(상속세가 맞음)를…』
『남녀간의 성 차별을 극복해야 합니다. 남녀간의 구분(구별)은 있어도 구별(차별)이 있어서는…』
『좋은 소식이 있습니다. 대만의 이붕 총리가…』(이등휘 총통에 대한 착각)
『제가 지금 정몽준(전봉준) 장군 고택에 다녀오는 길입니다』(11월26일 정읍 유세)
『제가 지금 박정희 대통령의 상가(생가)에 다녀오는 길입니다』(11월27일 구미 유세)
『이 곳 보천 대령에 오니…』(대천 보령 유세)>
이밖에 당시의 취재기자들이 기억하고 있는 金泳三 전 대통령의 대표적인 失言은 『강원도의 아름다운 지하자원』 『역사의 아이노리(아이러니)』 『우루과이 사태(라운드)』 『일본의 야쿠르트(리쿠르트) 사건』 등이었다. 金泳三 전 대통령의 이런 면모 때문에 지방 유세를 취재하러간 기자들은 으레 기사 송고 전에 그가 했던 말을 취재기자들끼리 모여 서로 확인한 뒤에 기사를 보냈다고 한다. 그대로 인용해 기사를 썼다가는 말이 안되고, 다른 기자들과 입을 맞추지 않으면 혼자 틀린 기사를 송고하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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