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친부모와 하나님의 존재
이스라엘 여행에 대해 언급했을 때 홀리는 의사들이 특별한 관심을
보인다고 느꼈다.내가 21세기의 흑사병에 필적할 만한 새로운 질병의 최초
증례가 될지 모른다는 사실은 둘째치고, 사망 가능성만으로도 이미 그녀는
너무 힘겨웠다.
그 사이 친구들과 친척들에게 연락이 갔다. 그중에는 나의 생물학적
가족이 포함되었다.
어릴 때 나는 아버지를 숭배했다. 아버지는 웨이크 포레스트 메디칼
센터에서 20년간 원장으로 재직했다. 직업으로 신경외과라는 학문을 선택한
것은 어떻게든 아버지를 따라가려는 마음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아주 영적인 분이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필리핀과 뉴기니의
정글에서 군의관으로 복무했다. 그 때 잔인한 폭력과 고통을 목격했고,
그 자신도 직접 고통을 받았다. 복무할 당시 일생일대의 사람인 베티
(사령관의 딸이었던)와 1942년 10월에 결혼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투하되고 전쟁이 끝났다. 그는 점령한 초기연합군에 소속되어
신경외과의사로서 공식적으로 없어서는 안 될 존재였다.
아주 어린 시절에 부모님은 나를 입양했다. 그들은 생물학적인 부모는
아니었지만 나를 친자식만큼 깊이 사랑했다. 생모는 1953년 나를 낳을 때
열여섯 살(고2년)의 미혼모였다는 사실을 자라면서 알게 되었다.
그녀의 남자친구는 고학년 학생으로 당장 아이 양육비를 댈 능력이 없었기에
결국 나를 포기하기로 동의했다는 것이다.
나의 손위 누이인 진도 입양됐는데, 그 후에 내가 입양되었다.
불과 5개월이 지나서 어머니는 임신을 했고 여동생 베치를 출산했고,
5년 후에 막내 여동생 필리스를 낳았다. 우리는 완벽한 형제자매였다.
대학과 의과대학원을 다니는 동안 나는 입양 사실에 관해 생각하지
않았다. 사실은 표면적으로만 그랬다. 나는 입양협회를 찾아가서 친모가
나를 다시 만나는 것에 관심이 있는지 여부를 여러 번 문의했었다.
그러나 법에서는 당사자들이 강력하게 만나고 싶어도 서로의 익명성을
강력하게 보호하고 있었다.
1999년 이븐 4세가 찰스 리버 학교 6학년 이었는데 가족문화유산
프로그램에 참여하게 되었다. 이븐은 내가 입양되었고 자기가 이름조차
모르는 친가족이 어딘가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프로그램을
계기로 아들은 그때까지 생각지도 못했던 어떤 강력한 호기심을 발동했다.
그는 내가 친부모를 찾아낼 수 있는지 물었다. 나는 그동안 어린이입양
협회에 가서 특별한 소식이 없는지 종종 문의했었다고 말해주었다.
2000년 2월, 어린이입양협회 사회복지사 페티와 통화가 되었다.
“저 사실은 새로운 소식이 있습니다.”
“알렉산더 박사님, 친부모님 두 분은 지금 결혼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친부모님께선 아이가 셋 더 있어요. 딸 둘과 아들 하나, 큰 딸과 연락이
되었는데, 여동생이 사망했고, 부모들이 슬픔에 잠겨 있다고 하고요.”
“박사님, 유감입니다만 그 분이 연락을 거절합니다.”
순식간에 나 자신에 대한 생각이 180도 바뀌었다.
나는 여전히 의사이고 아버지이고 남편이었지만, 난생처음으로 고아가
된 기분이었다.
이후 몇달간 내안에는 거대한 슬픔의 바다가 밀려왔다.
나의 우울증은 직업활동에도 영향을 끼쳤다. 부모님은 그저 옆에서
지켜보는 것 외에는 도리가 없었다.
이 우주에는 내가 공부해 온 과학적 지식을 넘어서는 힘을 가진
어떤 인격적인 요소가 있다고 반쯤은 믿었던 나의 희망을 완전히 사라지게
한 것이다. 이후로, 자비로운 인격적 하나님에 대한 개념을 완전히 상실했다.
우리 모두가 지켜보고 있는, 어떤 전능한 함 혹은 지성이 존재하는 것일까?
나의 친부모가 마음을 열고 다시 나를 받아줄 것인가 라는 질문에 대한
답처럼, “아니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