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마당

수양대군의 만행과 반역

mornmist 2020. 6. 22. 17:31

단종의 비극은 아는 이가 많아 달리 언급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다만  수양대군이 단종의 생모인 현덕와후 권씨와 문종의 묏자리를 

선정하는 데 깊숙이  개입한 것은 예사롭지 않아 보인다.

   현덕왕후 권씨는 단종을 낳은 뒤 산후통으로 사망했다.

   당대의 명풍수 최양선이 장지를 경기도 안산으로 정했다.

   그러자 외눈박이 풍수 묵효지가 이의를 제기했다.

   내룡이 약하고 길 때문에 끊어진 곳이 열 군데나 되어서 낳은 아이가

   녹아버린다. 악지이니 다른 곳으로 이장해야 한다는 요지였다.


 수양대군이 묵효지를 비난했지만, 묵효지는 자기 생각을 굽히지 않았다.

 결국 세종은 능자리는 놔두고 시신이 놓이는 위치만 바꾸는 것으로 타협했다.

그런데 묵효지가 이번에는 문종의 능자리도 문제가 있다며 단종에게 쪽지를

보냈다.

   단종이 쪽지를 도승지 강맹경에게 보이니, 즉각 묵효지를 비판했다.

   이에 단종이 이 문제를 의정부에 넘기자, 이 번에는 수양대군이 자신이

   정한 능지로 그대로 쓰자고 고집했다.  

   수양대군은 묵효지가 불경죄를 지었으니 국문하고 벌을 줘야 한다고

   단종을 물아세웠다.

숙부의 반발이 심하자 단종은 물러설 수 밖에 없었다.

수양대군이 정한 문종의 장지를 9척쯤 파자 물이 솟아 나왔다.

수양대군은 할 수 없이 문종의 장지를 태조 이성계의 건원능 동쪽으로   

바꿨다.


     수양대군에게 맞선 이는 또 한사람, 이 헌로,

단종이 즉위하자 “백악 뒤에 궁을 짓지 않으면 정룡(종손)이 쇠하고

방룡(방계)이 흥합니다. 태종과 세종은 모두 방룡으로 임금이 되었고

문종은 정룡이라서 일찍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이 말을 전해 들은 수양대군은 이헌로를 찾아가 주먹으로 두들겨 팼다.

   자신이 왕이 될 길을 막았으니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수양대군파 강맹경은 이 헌로를 지방으로 유배시키자고 했다.

   영의정 황보인과 좌의정 김종서는 구타당한 사람을 처벌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했다.  



불길한 조짐이 계속되자 수양대군은 1453년 10월 10일,

한명회, 권람 등을 불러 반역의 기치를 들었다.

그날 수양대군은 자신이 가장 두려워한 김종서를 없앤 후, 궁궐로 가서

단종을 협박해 대신들을 궁으로 불러모았다.  한명회가 만들어놓은 살생부에

따라   황보인, 이양,조극관 등 충신들을 궁궐에서 줄줄이 죽여버렸다.


  수양대군의 계유정난은 조카 단종과 유능한 두 신하 황보인 김종서를 

한꺼번에 몰살시킨 만행이었다.  

세종의 18남4녀 가운데 셋째 아들로서,문화적 소양이 가장 높은 

안평대군과 그의 아들마저 형 수양대군에 의해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안평대군은 서예로 명성이 높지만 당대 최고의 회화 수장가였다.

지금으로 치면 최고의 컬렉터였다.  안평대군의 수장품에 대해서는

신숙주가 쓴 [보한재집]의 화기 부분에 잘 나타나 있다.

화기는 안평대군이 자신의 수집한 222점의 수장품을 보여주며 기록으로 

남기라고 해 쓴 것이다. 


계속



   “비해당(안평대군의 당호로 세종이 직접 지어줌)이 서화를 사랑해

남이 한장의 편지, 한 조각의 그림이라도 갖고 있다는 말을 들으면

반드시 후한 값으로 구입해 그중에서 좋은 것으로 표구해 수장했다.


’나는 천성이 이것을 좋아하니 이 역시 병이다. 10년동안 이 만큼

얻게 되었는데 그대는 나를 위해여 기를 지으라 하셨다.’


신숙주가 분석한 바에 의하면 안평대군의 수장픔은

     당나라 오도자의 불화,송나라 곽희의 산수화, 

     원나라 조맹부의 묵죽화 등 중국 5대 왕조에 걸친 화가 35인의

     산수화 84점, 화조화 76점, 누각인물화 29점,글씨 33점이다.

     그리고 안견의 [팔경도][묵매죽도]등 30여점도 있었다.

신숙주는 안견을 이렇게 평했다.

     “우리나라에서 한 사람을 얻었으니 안견이다. 지금 호군 벼슬에 

     있는데 천성이 총민하고 정박하며 고화를 많이 열람하여 

     다 그 요령을 터득하고 여러 사람의 장점을 모두 모아서 절충하여

     통하지 않는 것이 없으나, 산수가 더욱 그의 장처로  옛날에 찾아도

     그에 필적할 만한 것을  얻기 드물다.  비해당을 따라 교유한지

     오래되었기 때문에 그의 그림이 가장 많다.”


  지금 가치로는 도무지 돈으로 환산할 수 없을 귀중한 문화재가 

안평대군의 사망과 함께 뿔뿔히 흩어져 찾을 길이 없다.

안평대군의 아들 이우직은 진도로 유배돼 사사됐고, 집과 재산은 몰수됐다.

그런 파란을 거쳐 안견의 [몽유도원도]는 일본으로 건너갔고,

국보 238호 [소원화개첩]은 2001년 도난당한 뒤 아직까지 행방이 묘연하다.


       “아, 물이라는 것은 완성되고 훼손되는 것에 때가 있고  

         모이고 흩어지는 것에 운수가 있으니  오늘의 완성이 다시

        후일에 훼손될 것을 어찌 알며

        그 모이고 흩어지는 것도 역시 기약할 수 없는 것이다.”

 라고 신숙주가 예언한 것처럼, 수양대군은 조선의 귀중한 문화 전체를 

제 욕심 때문에 망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