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마당

이승만과 419

mornmist 2020. 4. 11. 17:58

이승만은 어수룩한 미국을 움직여가면서 남한사회를 사실상 통제했던

공산의자들을 숙청 청소하고 3권이 분립되는 

미국식 민주주의의 터전을 닦았습니다.

김구와 김규식의 끈질긴 반대와 태클을 이겨내면서 헌법을 기초하고

미국의 도움을 얻어 현대식 국가기관들을 설치하고 행정인력과

과학인력을 양성했습니다.  만일 이승만이 장면처럼 우왕좌왕 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419 혁명세력은 이승만을 독재자,친일파, 미국의 앞잡이, 부정부패의 원흉

이라며 국민을 선동하고 있습니다.   이는 건국자체를 부정하려는

전략에서 나온 것입니다.  간첩 이석은 보안사 대공수사관 앞에서

“419는 내가 지휘했다” 고 실토하였습니다.


해방후의 대구는 남한의 모스크바로 불릴만큼 좌익세력이 들끓었습니다.

이영명 교수(정치학박사,중앙일보 논설위원)는 그의 저서

[통일의 조건-발상의 전환을 위하여]라는 저서에서

간첩 이석은 남로당 경북도당 간부로 대구폭동사건에 간여했고,

중앙당 간부로옮긴 후 체포,투옥됐다가 625전쟁 때 구출되어

인민군을 따라 평양으로 월북했습니다.

1955년 4월, 이석은 다시 경기도 화성군 남양만 쪽으로 상륙하여,

경남 마산에 아지트를 구축하고 2개의 친북계 모임을 통해 40명을

조직화하여 의식화 작업을 벌였습니다.  

315부정선거에 규탄하는 움직임이 일자 그는 이 40명으로 하여금 마산사태에

적극개입하여 사태를 격화시키는 데 앞장섰습니다.  


1960년 4월 11일, MBC는 마산 앞바다에서 최루탄이 눈에 박혀있는 

김주열(마산상고)군의 시체가 떠올랐다는 방송을 했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

419가 촉발됐습니다.최루탄은 곡사포처럼 공중으로 쏘지 사람의 얼굴을 

조준하여 직사포처럼 쏘지 않습니다. 그런데 김주열군의 눈에 박힌 최루탄은 

아주 깊이 박혀 바다 속에서 오랜 동안 파도에 부딪히면서도 빠져

나오지 않았습니다.  이는 과학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입니다.

대규모 시위의 불쏘시개는 언제나 시체가 담당했고 간첩들은 시위를

촉발시키기 위해 언제나 시체를 만들어 냈습니다.

이영명에 의하면 315부정선거에 대한 국민적 불만을 대규모 시위로

점화시킨 존재가 바로 간첩 이석이 이끄는 간첩부대였다고 합니다.


1980년 4월 17일, 김대중은 서울대 학생회 초청 연설에서 

“김상진, 김주열 못지않게 김재규도 충신이었다.”

김상진은 서울농대 학생으로 1975년 유신체제와 긴급조치를 반대한다며

분신자살을 했고 학생시위가 다시 타오르기 시작했습니다.

김대중은 바로 이런 희생자들이 또 다시 등장하여 혁명의 불을 지펴야

한다고 선동했고, 5월 무법천지를 이끌어 냈습니다.


이승만은 315부정선거를 명령하지도 않았고, 학생들에게

사격을 가하라는 명령도 내리지 않았습니다.  유혈사태가 발생하고서야

비로소 이기붕과 최인규가 무얼 잘못했는지 알았고,

그래서 그는 그 책임을 지고 학생들의 기개를 칭찬하면서 순순히 

물러났습니다.  경무대를 나와 이화장으로 갈 때 학생들의 거친

시위 속에서도 차를 타지 않고 걸어 나갔습니다.

민간인으로 하야한 시점에서 관용차를 탈 자격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세상에 이렇게 착한 독재자가 여기 말고 어디에 또 있겠습니까?

이런 애국자를 독재자라 모함하는 한국국민이 저주받을 것입니다.


만일 그가 좌파들이 말하는 독재자였다면, 그는 절대로 물러나지 않고

김일성이나 모택동처럼 시위학생들을 대량 살상해 버리고 처형했을 것입니다.

그는 수족들을 잘못 관리했다는 원망을 들을 수는 있어도 분단의 원흉이고

독재자일 수는 없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