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등장과 화폐개혁
2009년 하반기에 들어서 무렵, 당회의 등에서 ‘대장동지’,
“우리 당은 역사적 전환기에 처해 있다” 등의 표현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김정은의 이름이 슬며시 등장했다. 북한 각처에 “장군복,
만경대 혈통, 백두의 혈통을 이은 청년대장 김정은 동지” 라는 문구와
함께 김정은 찬양가인 [발걸음]의 가사가 적힌 포스터가 나붙었다.
북한은 김일성 탄생 100돌인 2012년까지 강성대국 건설을 위한
세가지 과업을 추진했다. 헌법개정, 핵무장, 경제건설이다.
이 가운데 헌법개정은 2009년 4월 완료했고, 핵무장은 2009년 5월
제2차 핵실험을 실시함으로 진일보했다. 하지만 경제 건설에서의
성과 달성은 기대에 못미쳤다. 그래서 단행한 것이 화폐개혁이다.
북한주민들은 돈이 생겨도 은행에 입금하지 않는다. 인출이 자유롭지
않기 때문이다. 장마당에서 번 돈은 집안에 쌓아두었다.
당국은 수백만 명에 달하는 군인과 공무원, 국영기업소 노동자의 월급을
지급하기 위해 끊임없이 돈을 찍어내야 했다. 인플레이션이 무섭게
악화되는 구조였다.
실례로 부국장인 내 월급이 2900원이고 장마당에서 거래되는 쌀 1kg
가격이 3000원이 넘었다. 그럼에도 생활이 가능한 것은 국가 배급이
있기 때문이다. 소속 성원에게 쌀을 국가 가격인 1kg 40원에 배급한다.
쌀 배급일이 실절적인 월급날이다. 공무원치고 월급을 그대로 가져가는
바보는 없다. 여직원이 모든 성원의 월급을 가지고 있다가 쌀 배급일에
배급값을 제하고 나머지는 또 건사해둔다.
김정일이 화폐개혁을 시도한 것은 인플레이션을 막고, 주민들이 집안에
쌓아둔 돈을 끌어내는 것이었다. 장마당을 통한 자본주의 경제 확대 또한
막으려고 했다. 구권 100원을 신권 1원으로 교환해 주고, 교환 액수에
제한이 있었다는 점이 문제였다.
화폐개혁 선포 당일, 한 가구당 10 만원만 교환해 준다고 했다.
그러더니 며칠 후, 별도로 가족 1 명당 5만 원까지 추가 조정됐다.
특히 장마당 주민들의 손해가 막심했다. 특권층이나 돈주(큰 상인)들은
이미 달러, 유로, 위안화 등으로 거래를 하거나 재산을 모으고 있었기
때문에 피해가 덜했다.
대대적인 저항이 일어났다. 상점들이 문을 닫고 시장에서 상품이
없어졌다. 평양시당 책임비서 김만길이 주민들 앞에서 사과하고
모든 상업 활동을 재개해 달라고 호소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사람이 일단 돈버는 재미를 들이면 되돌릴 수 없다. 생존권이 달린
문제라 결사적인 저항이었다. 목숨을 걸고 반발했다. 김정일은 그런
이치를 몰랐다.
종전에 1달러당 3000원 정도였던 화폐 가치가 1달러 대 100원이 되었다.
쌀 1kg의 시세도 50원 언저리로 하락했다. 문제는 배급 쌀값은 40원이라는
점이다. 이전에는 직장에서 40원을 주고 사서 장마당에 3000원에 팔 수
있었다. 이제 누구도 배급 쌀을 사러 하지 않았다. 배급쌀은 군량미 창고
에서 묵은 품질이 떨어지는 쌀이니 당연했다.
화폐개혁은 시행 한 달만에 참담한 실패로 돌아갔다.
북한에서 당의 정책이 이렇게 막을 내린 것은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김정일 주민들의 불만을 가라앉히기 위해 당경제정책비서 박남기에
모든 책임을 뒤집어씌우고 그를 처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