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정치가의 지혜
1950년대 후반 한일협상의 가장 큰 난관은 제일조선인의 북송문제.
일본은 제일조선인이라는 귀챦은 짐덩어리를 어디엔가 떠넘기고
싶어 했고, 북한은 이들을 받아들임으로써 전쟁으로 인한 인력 부족을
메우고 대내외에 자신들의 우월성과 정통성을 선전하고 싶어 했다.
1959년 12월, 일본 니카타항에서 북송선이 출발하자 대한민국
정부는 발칵 뒤집혔다. 이승만 대통령은 크게 진노하여 국무위원들
에게 말했다.
“여러분, 미국의 덜레스 국무장관부터 친일파 일색이라 일이 저렇게
돌아가요. 국무위원들은 그사람 파면시킬 방법을 좀 연구하시오.”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은 이승만 대통령은 대일관계 단절을 선언하고
진해에 있는 별장으로 내려가버렸다. 모든 대일 수출입은 동결되고 발전소 유지 보수용 수입마저 금지됐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서울로 올라온 대통령은 각 군
참모총장을 경무대로 호출했다. 육군의 백선엽, 공군의 김창규,
해군의 이용운 참모총장은 경무대에 도착, 대통령은 우리군의
적극적인 대책을 요구했다.
뾰족한 대책이 있을 리 없었다. 군 간부들은 서로의 얼굴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꾀 많은 김창규 총장이 돌연 무릅을 치며
“좋은 수가 있소! 이렇게 합시다.”
“그게 말이오…….”
이들은 쾌재를 부르며 경무대로 갔다. 이 대통령은 우르르
몰려온 간부들을 둘러보며 물었다.
“그래,의논들을 해봤소?”
김창규 총장이 먼저 나섰다.
“예, 각하, 제일교포 북송에 반대하는 우리들의 결연한 의지를
일본측에 보여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한다는 말이오?”
김총장은 결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저희 공군은 일본 규슈를 폭격하겠읍니다.”
“오호, 폭격을?”
백선엽 총장이 말을 이었다.
“육군은 규슈에 상륙하겠읍니다.”
마지막으로 이용운 총장이 쐐기를 박았다.
“해군은 수송하고 엄호하겠습니다.
한일국교정상화도 되지 않은 상황에서 무력을 행사한다는 것은
한일간에 전쟁을 벌이겠다는 이야기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이 대통령은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암, 그래야지! 그래야 한국군이지! 우리 동포가 북한에 실려
가는 걸 가만히 보고만 있으면 그게 무슨 한국군이겠소!”
대통령의 말에 3군 참모총장의 얼굴은 하얗게 질렸다.
대통령이 이렇게 나올줄은 꿈에도 몰랐던 것이다. 자신들이
강경하게 나오면 깜짝 놀라서 ‘아니! 이 사람들이! 지금 일본하고
전쟁을 하겠다는 얘기요? 우리가 그럴 여건이 된다고 생각하시오?’
하면서 뜯어말릴 줄 알았던 것이다.
참모총장들이 아무 말도 못하자 대통령은 씨익 웃으며 말했다.
“그런데 무력행사란 건 시기가 중요해. 적당한 시기를 봐서 내가
따로 지시할 테니까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기다리시오.”
당연한 얘기지만 지시는 내려오지 않았다. 어떤 사람들은 대통령을
‘천지를 모르는 영감’이라며 악평을 했지만. 그의 강경한 태도에는
항상 정치적인 의도가 숨어 있었다. 전쟁이라도 일으킬 듯이
강경한 입장을 내보임으로써 미국과 일본을 긴장시키고, 실익을
취하려는 정치적 행보혔던 것이다.
신현확이 본 이승만 대통령은 대단히 지혜로운 인물이었다.
이 대통령은 숱한 오해와 비난을 받으면서도 휴전회담 과정에서
줄기차게’북진론’을 제기했다.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우리나라는 한국전쟁으로 인해 엄청난 인명 및 재산상의 피해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휴전협정의 당사자가 될 수 없었다.
이승만 대통령의 ‘북진론’은 전쟁의 당사자인 한국이 휴전회담의 당사자가 될 수 없는 아이러니한 현실을 뚫고 나온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휴전거부권’이라는 협상카드를 내밀었다.
국제사회가 더 이상의 전쟁을 원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꿰뚫어보고
남한만이라도 북진통일을 이루겠다고 주장한 것이다.
당시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던 절묘한 수단이다.
휴전이 다급했던 중국의 마오쩌둥과 영국의 처칠은 이승만의
요구를 들어주라고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을 압박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닉슨 부통령을 특사로 보내 이승만을 설득
하려고 했다. 닉슨은 당시의 일화를 회고록에 남겼다. 워터게이트
사건 이후 영문판으로 이를 입수해 읽어 본 아버지는 다음과 같이
그 내용을 설명했다.
닉슨이 한국에 와서 방문 첫날 이승만 대통령을 예방했다.
정식 회담은 다음 날 오전 10시로 잡혔다. 그런데 이 대통령은
닉슨을 잡고 북진통일을 해야 한다고 냅다 떠들었다.
그 날 미 대사관에 간 닉슨은 이렇게 말했다.
“내일 회담은 하나마나요. 이래서야 무슨 소용이 있겠소.”
그의 예상대로 회담에서는 이야기가 전혀 진전되지 않았다.
다음 날 닉슨은 경무대로 고별방문을 갔다. 이 때 이승만은 말했다.
“당신이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친서를 내게 전하지 않았소?
내가 회답을 써놨는데 편지를 봉하지는 않았소.
그래도 당신이 부통령인데 편지 내용도 모르고 그냥 편지 심부름만
한다면 체면이 서지 않을 것이요. 그러니 동경에 도착하거든 이
편지를 읽어 보고 그 다음에 봉해서 대통령에게 갖다 주시오.”
(계 속)
닉슨은 도꾜에서 읽어 봤다고 회고록에 써놨지만 아마 대통령과
헤어진 위 당장 읽어 봤을 거라고 아버지는 웃으며 말했다.
이승만의 편지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한국은 북진통일을 할 실력도 준비도 안 돼 있소.
국제적으로도 해결되지 않을 것이 명백한데,
어찌 우리가 북진통일을 하겠소.
그러나 적은 매일처럼 적화통일을 부르짖고 있는데
우리 쪽이 ‘싸우지 않겠다’고 되풀이하고 있으면 전쟁억지력이
생기겠소? 우리가 북진통일을 하겠다고 해야 억지가 되지 않겠소?
나는 바로 그런 의미에서 북진론을 이야기한 것이오.
그게 현실적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라는 것은 당신들이 더 잘 알고
있지 않소. 알면 대책을 세워야지 ‘북진통일’을 말하는 것 자체를
문제 삼을 게 뭐가 있소.
닉슨은 회고록에서 ‘노정치가’의 지혜로운 행동과 사고방식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고 겸허하게 말했다.
그런데도 한국에서는 ‘노망한 늙은이가 덮어놓고 북진총일을
떠들어댔다’는 식의 평가가 여전히 존재한다는 게 아버지의 지적
이었다.
실제로 ‘북진통일’을 무기로 내세운 이승만 대통령은 경무대에 앉아
미국 대통령 특사를 불러들일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한국은 초토화된 국토의 전후 복구비와 경제원조,
국군 20개 사단으로 무장 증강, 한미 상호방위조약 체결 등
국가경영에 필요한 결정적 수단들을 미국으로부터 받아낼 수
있었다. 그것도 구걸해서 얻은 게 아니라 미국을 봐주는 모양새를
취하면서 여유있게 확보한 것이다.
오늘의 대 한 민 국 이 있게 한 것이다.
신 현 확 의 증 언 에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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